[자유 게시판] 독립문 앞의 이완용

1897년 11월 20일 독립문 앞의 이완용

독립문이 1897년 11월 20일 세워진다. 새 임금이 즉위하면 책봉 칙서를 가지고 오는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을 헐어버린 터에 독립문이 선 것이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한 양식에다가 조선의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과 태극기를 새긴 ‘독립문’은 그로부터 지금까지의 이그러진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는 증인이 된다. 독립신문은 영어판 사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구미 열강으로부터의 독립도 의미하는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독립문 낙성식 때 가장 빛난 사람은 다름아닌 이완용이었다. 초대 독립협회장으로서 축하 연설을 했고 독립문 상단의 '독립문' 글씨는 명필로 이름난 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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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 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여색을 멀리하고 한학과 서예에 밝은 반듯한 선비로 자라난 그는 궁벽진 왕국에서 보기 드문 인재라 할만했다. 외교관으로 미국에 나가 국제 감각을 익혔고, 넉 달 정도의 학부대신 재임기간 성균관을 개편하고, 소학교령과 한성사범학교 규칙을 공포하여 우리 교육사에 확연한 자취를 남길 만큼 행정 능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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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사신 한 사람이 정부에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달라 하여 그때 내각에 있는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론이 있었다. 이완용씨가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해 주지 못하겠다고 정정당당히 말한 고로, 그 외국 공사가 이완용씨를 좋아하지 않아 매우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다.”(독립신문 기사)고도 하니 그렇게 흐물흐물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미국 주재 외교관을 지냈고 미국에 각별한 호의를 드러냈으나 을미사변 후에는 친러파로 변신하여 아관파천의 주역이 됐다. 적어도 이때의 이완용은 일본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하지만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퇴한 뒤에는 친일파에 합류한다. 그것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한 판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맑은 덕과 중한 물망의 소유자“이자 “대한의 몇 안되는 명신”으로서 그는 대한제국의 ‘국익’을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조카가 남긴 그의 일대기 ‘일당기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 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그랬다. 그는 항상 ‘합리적’으로 생각하고자 애썼고 ‘실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적당함’을 추구했다. 그리고 결국 그와 같은 합리적인 사고와 실리의 추구는 한 나라를 없애 버린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기대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었고, 약한 나라가 끝내 힘을 얻지 못하면 강한 나라에게 굴복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을 막겠다고 쓸데없는 피를 흘리는 일은 지극히 불필요한 낭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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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립문 건립 기념식에서 열변을 토한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고 말이다. 언뜻 당연한 말 같지만 그 안에는 “만약 제대로 못하면 남의 종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숨어 있었고, 그는 결코 그 종됨을 거부하여 목숨을 걸 생각이 없었다. 사세부득이할 경우 ‘합리적 판단’을 통해 강자의 편에 붙는 것은 그 평생의 습관이었고 그는 그대로 행동한다.

그는 세상에서 처신하기 힘든 처지 세 가지를 얘기한 바 있다. 파산한 회사의 청산인, 빈궁한 가정의 주부, 그리고 쇠약한 국가의 재상의 처지가 그것이다. 자신이 그만큼 괴로웠다는 투의 이야기지만 그 셋은 ‘사람이 하기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노릇의 주역이 되기도 한다. 회사를 돌보지 않고 자기 재산만 빼돌리려는 청산인과 애새끼를 굶어죽어가는데 샛서방 코빼기만 쳐다보는 주부와 쇠약한 국가로 무슨 일을 하겠는가고 지레 포기하고 제 살길 찾는 재상은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이들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완용이 그였다. 똑똑하고 영특하며 강단도 적당한 애국심도 있었던 그였지만 “사세가 부득이할 경우” 그 지혜는 자신의 나라에 대해 냉정하고 비정했다. 오늘날 ‘뼈 속까지 친미’인 사람들의 ‘애국심’과 ‘능력’은 그렇지 아니하리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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